이미 미니멀리스트 같았던 내 씀씀이
10년도 더 전에 컴퓨터를 새로 샀었다. 조립형 PC였고 그때는 내가 노트북을 쓰게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때였다. 이 스피커는 10년 전에 사은품으로 받았었고, 그 후에 한 번 컴퓨터를 바꿨었는데 스피커는 그대로 썼었다. 새로 살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는데, 어차피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주로 쓰기 때문에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나는 돈을 꼭 써야된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 돈을 다른 곳에 쓰고는 했다. 스피커, 마우스, 키보드, 옷, 새로 사야만 하는 것들 투성이였지만, 나는 꼭 필요한 곳에는 돈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 대신 그 돈을 자격증 학원에 쏟아부었다. 어쩌면 옷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을, 식당에 가서 괜찮은 한끼를 먹을 수도 있었던 돈을 다 긁어모아서 시험 응시료, 교재비, 인터넷 강의에 다 가져다 바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 책들을 다 사서 읽어야만 했던 걸까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지금도 한국에서 살거나 하면 한치의 후회도 없을 테지만, 출국을 하기 전에 어쩔 수 없이 다 버리거나 중고서점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책들은 도서관에서 읽을 수도 있었고, 자격증 준비는 그냥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독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였다.
심지어 그때 취득한 자격증들은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할 거라면 몰라도, 영국에서 일을 하는 데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의 스펙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자격증을 공부한 건 후회하지 않아도, 거기에 지출한 막대한 돈은 조금은 후회하고 있다. 지금은 완전히 미니멀리스트를 선언을 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단순히 소비를 하지 않는 걸 떠나서 불필요한 소유조차도 줄여나가는 중이다. 내가 쓰지는 않지만 단지 내가 필기했었다는 이유만으로 못 버렸던 책들, 사이즈가 맞지 않게 되었지만 단지 내가 살이 빠지기 전에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지고 있던 바지들, 단지 내 사진이 찍혀있다는 이유만으로 버리지 못했던 앨범들 전부 줄여나가고 있다.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세대가 바뀌지 않았다면 내가 과연 미니멀리스트일 수 있을까? 버리는 데 더 주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 기록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버리기 전에 사진을 찍는다. 물건을 샀던 날은 어땠는지, 이 물건을 쓸 때 어떤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버릴 때 마음이 어땠는지 글로도 써둘 수 있다.
내가 미니멀리스트를 자처한 이유는, 이전 글에서도 적었듯, 내 방의 공간을 너무 손해를 보면서 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책은 여러 권 모아두면 꽤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물품 중 하나고, 옷과 가전제품도 꽤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같은 부피에 더 좋은 성능을 가졌거나, 부피가 거의 반의 반 수준인 물건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만약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더 작은 물건으로 대체를 하거나, 필요가 딱히 없는 물건이라면 그냥 버리기만 한다. 이 스피커의 경우에는 딱히 나에게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나에게는 헤드폰도 있고,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도 있다. 스피커는 그냥 노트북에 내장된 스피커를 주로 사용한다. 음질에는 따로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새로 스피커를 사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내겐 너무 빠른 변화
안 쓰는 물건을 버리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한 번에 너무 많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니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방을 더 넓게 쓸 수 있게 되었고, 필요가 없어진 물건들을 정리해서 버렸다. 평소라면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을 부분까지 신경써서 청소하게 되었으니, 더 건강한 삶을 살게 된 건 맞다. 하지만 한 번에 너무 많은 물건들을 정리하다보니 갑자기 너무 내 방의 모습이 바뀌어서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10년에 걸쳐서 조금씩 짐을 줄여나가도 될 만큼의 양을 너무 한 번에 몰아서 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출국은 해야겠고, 그 많은 물건들을 다 가지고 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미뤄뒀던 대청소를 하고 출국을 한 달 앞둔 시점부터는, 진작에 방 좀 정리하면서 살 걸, 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관심이 없는 물건들도 괜히 아쉬운 마음에 버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방을 좁게 쓴 것으로도 모자라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먼지 투성이인 방에서 살아왔다. 그래도 출국 직전에나마 습관을 들여놓은 덕분에, 영국에서 생활하면서도 짐이 크게 불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에도 생각보다 그렇게 춥지 않아서 가지고 왔던 롱패딩이 망가졌을 때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었다. 더 가볍고 작은 물건들로 대체해왔기 때문에 놀라볼 정도로 내 방은 가벼워졌다. 공간의 낭비 없이 방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스피커의 생명력
내가 이 스피커를 10년 동안이나 썼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고작 스피커 하나 버리면서도 역시 삼성은 삼성이구나 싶었다. 사실 겉만 닦아내면 며칠 전에 샀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멀쩡하게 생겨서 정말로 내가 10년이나 쓴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에는 스피커를 잘 쓰지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공부하는 것보단 영화나 미국 드라마 보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방 문을 잠그고 몰래 영화를 볼 때가 많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숨어서 몰래 영화를 봤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게 불량한 취미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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