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헐렁해진 바지를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입어서 바지가 늘어난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안 먹고 다녔으면 살이 이만큼이나 더 빠졌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바지의 경우에는 내가 살이 빠져서 헐렁해진 건 아니었다. 이미 살은 더 빠질 살이 없을 만큼 빠져 있는 상태일 때 입었던 바지니까.
오래 입었던 바지이기도 하고, 이 바지를 입고는 험한 일을 많이 해서 허리 부분만 기묘할 정도로 늘어나버렸다. 벨트를 매면 티가 덜 나기는 했지만, 벨트로 조인 부분에 땀이 차면 이것보다 성가신 일이 없다. 여름에 입으면 허리띠 부근에 땀띠가 올랐는데 이게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다.
재작년 여름쯤에 출국을 준비하느라 한창 돌아다녔을 때, 결국 참다 참다가 허리에 벌겋게 올라와서 그날을 마지막으로 청바지를 버렸다. 가뜩이나 출국을 두 달 앞둔 시기여서 신경쓸 것도 많고 여름이라 짜증도 많이 나던 때였는데 굳이 내가 바지때문에 짜증을 더 내야 하나 싶어서 그냥 편한 바지 하나를 더 사서 입었다.
사실 워킹 홀리데이가 아니었더라면 이 바지를 버릴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여름 무더위에 이 바지를 입고 돌아다닐 일도 없었을 거고, 재작년 여름에도 출국 준비만 아니었다면 사무실에 앉아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일을 했을 텐데, 어쩌다보니 영국까지 오게 되었다. 지금이야 영국에 눌러앉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재작년 여름에는 아일랜드 어학연수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여러 유학원을 돌아다니면서 상담을 받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현실과 통장 잔고를 마주칠 때마다 씁쓸해지는 마음까지 겹치고 겹치다보니 정말 사소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물건들을 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 청바지만큼은 지금 와서도 잘 버렸다고 생각한다.
나의 과한 청바지 사랑
청바지는 슬렉스와 더불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옷 종류 중 하나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무난한 옷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편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요즘 들어서는 허리가 딱 맞는 바지나 고무밴딩을 더 선호하게 되었는데 이게 다 재작년에 버렸던 저 청바지 때문이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었을 때 주로 입었던 바지인데, 이 바지를 입고 격한 운동을 한다거나 오래 걸어본 적이 없어서 그 전까지는 몰랐다. 그런데 경험을 해보니 차라리 헐렁한 바지를 조여서 입는 것보다 벨트를 하지 않고도 딱 맞는 바지를 입는게 장기적으로 보면 더 괜찮은 선택이었다. 인위적으로 벨트로 조이는 게 아니라 골반에 자연스럽게 걸쳐 입을 수 있는 청바지를 입기 시작한 이후로 여름마다 올라오던 땀띠도 사라졌다.
사실 그동안 여름마다 당해온 걸 생각하면 청바지를 포기할 법도 한데, 나름대로의 대안책을 찾아서 여전히 입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참 한결같다. 청바지의 기원을 찾아보면 내가 청바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청바지는 육체 노동자를 위해 발명된 옷이고 오래 입을 수 있으면서 편하다. 옷에 돈을 쓰기 싫어하면서도 편한 걸 좋아하는 나에게 딱 어울리는 옷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슬렉스를 처음 입어보고 옷에 돈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청바지보다 더 가볍고 편하면서도 캐주얼 양복을 입을 때 정장 바지 대신 입을 수도 있으니 더 만능인 것처럼 보였다.
청바지의 질긴 생명력이란
꽤 오래 입었는데 색은 별로 빠지지 않았다. 거의 3년은 입은 것치고는 색이 확실히 적게 빠졌다. 버리기 전에 어디 브랜드인지 확인이라도 한 번 했어야 했나 싶기도 하지만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영국에서도 근처 저가형 의류매장에 가서 싼 옷 골라 입을 텐데.
단 한 가지 변한 게 있다면, 꼭 청바지만 고집하던 패션에서는 벗어났다는 거다. 청바지를 입었던 이유 중에 제일 그럴싸한 이유는, 옷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택장애가 있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선택지가 주어지면 간단한 거 하나 고르느라 시간낭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걸 막기 위해서 항상 청바지를 입고, 음악을 들을 때에는 어플에서 정해주는 대로 랜덤으로 듣거나 했다.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는 모르지만, 청바지가 아닌 다른 옷을 입는다고 해서 옷을 못 고른다거나 음식점에서 뭘 먹을지 한참 고민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때의 나는 신중했던 것도 아니었고 항상 기회비용 운운하면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겁을 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인생을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선택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내가 먹고 싶으면 내가 먹는 거고, 내가 좋은 선택을 하든 나쁜 선택을 하든 그건 손해도 아니고 내가 못나거나 잘나서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음식점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겁내는 일도 사라졌다.
내가 그동안 미니멀리스트가 되지 못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간단한 데에 있다. 내가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물건을 잘못 버릴까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설령 물건을 정말 잘못 버렸다 한들, 음식점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 한들, 그게 무슨 큰 일이라고 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을까 지금도 의문이 든다.
내가 받을 손해라고 해봤자 사실 '더 맛있는 거 먹을 수도 있었을 텐데' 또는 '조금 더 입을 수 있었을 텐데' 정도의 사소한 손해일 텐데 그동안 너무 나는 이것 저것 재느라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 죄도 아니고 정말 내 인생에 중대한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공부 하고 싶으면 하고, 먹고싶은 거 먹으면서 사는게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가볍게 살자고 다짐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 가치관이 바뀐 셈인데, 청바지를 대하는 태도가 특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선택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때문에 청바지만 고집했는데, 트레이닝복과 슬렉스도 같이 입어보고 하니까 그냥 나는 청바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청바지를 좋아해서 입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기 귀찮아서 청바지를 입는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래도 한국에서 옷은 좀 챙겨올 걸 그랬다
한 가지 크게 후회하는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저렴한 옷을 아무렇게나 사 입어도 괜찮게 입을 수 있지만, 영국에서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곳부터가 일단 흔하지 않다. Primarks가 그나마 괜찮았는데 너무 콜라보 상품이 많아서 왠지 피하게 돼고, 자라(ZARA)도 있는데 뭔가 기본 아이템만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유니클로는 괜찮겠지 싶었지만, 한국에서와는 다르게 가격이 정말 사악하다. 납득 못 할 가격은 또 아니면서도, 유니클로가 이 돈을 주고 사 입을 브랜드가 맞나 싶다.
그나마 자주 가는 곳은 TK막스(T.K maxx)다. 가격이 좀 나가는 브랜드도 있지만 한쪽 구석에는 아웃렛 할인 코너가 있어서 운만 좋다면 정말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자라 브랜드의 부츠를 거의 4분의 1 가격에 구매했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이 망가지고 이 부츠가 망가지기 전까지는 새 신발을 살 일이 없으니 아마 1년 동안은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내가 가게에 가서 옷을 보면 투박한 옷들밖에 안 보이는데 런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예쁜 옷들을 주워서 입고 다니는지 의문이다. 아직 내가 영국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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